세상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중에서 아픈 사람도 너무 많다. 누구나 자기가 아프기를 바라지 않고, 아파도 그걸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나 역시 이제껏 내가 아플 거라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너무 건강하고 튼튼했다. 그런데 수능을 8일 앞둔 내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백혈병이란 병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며칠 지난 어느 날 아침 등교길이었다. 4층에 있는 교실로 향하는데 너무 숨이 찼다. 고3이라고 운동도 하지 않고 책상에만 앉아서 살만 찌니 결국은 이렇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날이 지날수록 1층 현관에서 4층에 있는 교실로 올라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5분, 10분, 심지어 나중에는 30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000미터 오래달리기를 전속력으로 뛴 것 같은 느낌에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렇게 간신히 교실에 들어서면 바로 책상에 엎드려 뻗어버렸다. 친구들이 아무리 깨워도,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깨워도 일어나지 못했다. 입술이 하얗게 질려버려 4교시 때까지 전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몇 주 후, 무릎 근처에 지름 15센티미터의 커다랗고 시커먼 멍을 발견했다. 이상했다. 어디에 부딪힌 기억도 없는데 멍이 너무 컸다. 그리고 일 주, 이 주가 지나도 그 멍자국은 없어지기는 커녕 색이 옅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후 또 며칠이 지나 학원을 다녀와 옷을 갈아입으면서 종아리에 이상한 반점들을 발견했다. 빨간 수성 사인펜으로 온 다리에 점을 찍어놓은 것 같았다. 엄마와 함께 찾아간 동네 피부과에서는 너무 피곤하면 모세혈관이 터져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라며 바르는 피부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러나 그 약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온몸이 결리는 듯 아팠다. 그렇게 하여 또 다시 정형외과와 한의원을 찾아가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한 번도 아파본 적이 없던 나는 중요한 시기에 병원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그러나 정형외과와 한의원에서 역시 스트레스에 의한 신경통이라며 약간의 물리 치료를 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날이 가도 몸은 크게 좋아지지 않았다. 다리에 생긴 멍과 빨간 점들은 2달이 지나도록 그대로였고, 몸 여기저기 결리고 아픈 것도 낫지 않았다. 이제는 한 수 더 떠서 가만히 있어도 잇몸 여기 저기에서 피가 나곤 했다. 그렇지만 고3병이라며 수능만 끝나면 다 낫는다는 주위 어른들 생각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이러한 상태에 어느 정도 적응되자 그리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수능을 12일을 앞둔 10월 25일 금요일 아침. 도저히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온 몸이 녹아 침대에 눌러 붙은 것만 같았다. 결국 학교에 결석하게 되었다. 지각을 하거나 조퇴를 해본 적은 있었지만 아파서 결석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날은 온종일 잠만 잤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 날 ‘학생은 아파도 학교에 가서 아파야 한다’는 철칙을 지닌 아버지가 나를 다그치셨지만 여전히 학교를 갈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해 답답해지신 어머니는 감기몸살 같다며 나를 데리고 동네에 있는 내과로 향했다. 내과 선생님께서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시고 다리의 멍과 반점을 살피셨다. 그리고 피가 나는 내 잇몸을 보시고는 다른 처방 없이 피검사를 하자고 하셨다. 피를 뽑아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수능이 채 2주도 남지 않아 초조하고 불안했지만 나의 고민과는 상관없이 내 몸은 피로했고, 그 날과 그 다음 날까지 꼬박 잠에 빠졌다. 그리하여 월요일, 한결 나아진 듯한 느낌에 학교를 갈 수 있었다.
10월 29일 화요일.
나는 학교로 향했고 그 시간 어머니는 피검사 결과를 알아보기 위해 동네 내과로 향하셨다. 2~3일 누워 있던 것이 아쉬워서 수학문제를 풀고 있던 자습시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신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오셨다. 동네 내과에서 내린 처방은 모든 혈액수치가 일반인에 비해 월등히 낮으니 어서 큰 병원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가서 영양제나 한 대 맞으면 괜찮겠지 하는 것이 어머니와 나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교실에서 빠져 나와 병원으로 향한 것이 내 고등학교 생활의 마지막이 될지는 상상도 못했다.
다행히 집이 아산병원과 가까웠다. 너무 급작스런 마음에 다른 병원을 알아볼 여유도 없이 가까운 아산병원의 응급실로 직행했고 엑스레이 촬영을 하였다. 그리고 피를 뽑아가기를 수 차례. 다급해진 듯한 의료진들은 투명한 팩에 담긴 노란 액체를 나에게 주입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중에는 지겹도록 접해 정겹기까지 한, 우리 몸의 온갖 지혈을 담당한 혈소판이었다. 20개가 넘는 혈소판들이 내 몸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 받는 수혈에 머리가 멍해지고 눈 앞이 캄캄해지면서 속이 답답해져 왔다. 그래서 마신 한 잔의 찬물이 화가 되어 2시간 넘도록 턱이 딱딱 부딪히도록 떨어야 했다.
영양제 한 대만 맞고 나올 거라는 나의 생각과는 달리 나는 입원수속을 밟아야 했다. 다음 날 새벽이 되도록 나는 계속 수혈을 받았다. 허나 2팩 이상의 수혈이 불가능했다. 처음 받는 수혈인데다가 혈관이 유달리 약한 나는 수혈을 통한 무리한 자극에 매우 힘들어했다.
다음 날, 인턴이 다가와 가슴에 중심정맥관이라는 것을 삽입하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난 곧 퇴원하게 될 것이고, 나에게는 아무 이상도 없으니 그런 수술은 받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했다. 정체불명의 약들을 한 주먹씩 먹으면서도 곧 퇴원할 거라는 생각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날 저녁, 나는 내 인생을 뒤흔들어 놓은 무지막지한 이야기를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어머니를 통해 듣게 되었다.
"수현아, 수현이가 걸린 병이… 백혈병이래…"
백혈병. 내가 그 때까지 알고 있던 백혈병이란 병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리고, 어느 드라마에서나 이 병에 걸린 주인공이 죽어버리고 마는 희귀한, 잘 알지는 못하지만 무시무시한 병이었다.
'내가 그런 병에 걸렸다니…, 내가 왜?’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뒤늦게나마 공부를 하겠다고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지내왔는데 수능 8일 전에 백혈병 판정이라니.
요새는 의학기술이 발달해서 치료만 잘 받으면 낫는다는 말이 너무나도 잔인하면서도 낯설게 들려왔다. 정말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기분을 모른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조차 내 심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나를 보살펴주기 위해 병원에 같이 계시던 어머니와 나는 그 날 밤 내내 울기만 했다. 무기력해진 채, 우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부모님은 좋은 치료를 받고자 여러 병원을 수소문했고, 다른 어느 병원보다 우리가 현재 있는 아산병원이 혈액암에 있어 최고의 의료진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심각한 병에 걸려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도 전에 이미 치료는 시작되었다. 가슴에 관을 삽입하는 수술을 받기 위해 나는 바퀴가 달린 침대에 누워 낯설고 무서운 수술실로 혼자 실려 들어갔다. 어떻게 무슨 정신으로 그 수술을 마치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중심정맥관 삽입시술 후 출혈이 많아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이었지만 수능을 봐야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더욱이 단지 잠깐의 병원생활로 친구들과 다른 길을 택하고 싶지 않다는 어린 마음이 나를 의지의 학생으로 변하게 하였다. 학교 담임선생님과 선생님들 몇 분이 병원을 방문하셔서 힘겨운 총정리를 하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수능을 맞고자 했다.
물론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험 바로 하루 전날에도 항암주사를 맞아야 하는 나를 병원측에서는 시험을 보러 외출 보낼 수 없다며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바닥을 향해 달리는 간들간들한 혈액수치와 극도로 낮아진 면역력 때문에 외출했다가 혹시 작은 병균에라도 감염이 된다면 큰 일이 날 것은 뻔한 이야기였다. 주치의 선생님은 병실에서 시험 볼 것을 권유하였지만 교육부에서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만하면 시험을 포기하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떼를 썼다. 어쩌면 한 번도 진지하게 임해보지 못한 고등학교 생활이 끝난다는 생각에서 생긴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병원과 교육부의 절충선인 앰뷸런스에서 시험을 보기로 했다. 고집을 부리는 내가 어이가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내 의지를 높게 사준 것이었을까. 병원에서는 내가 타고 가서 편안히 시험을 볼 수 있도록 가장 넓고 편안한 앰뷸런스를 제공해주었고, 여러 응급물품들을 준비해주었고, 특히 급작스러운 상태에서도 잘 대처할 수 있도록 간호사선생님이 동승해주셨고, 그리고 앰뷸런스를 계속해서 적절온도로 조절하고 유지해주실 기사아저씨까지도 붙여주었다.
점심시간에는 격리식을 해야 하는 나를 위해 병원에서 특별히 준비해준 도시락을 먹었다. 국가의 특별 인사나 경제적으로 넉넉한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일반인을 위해 그러한 배려를 해준다는 것을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그런 큰 배려를 받았다. 오로지 나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무사히 수능을 볼 수가 있었다. 만족할 만한 성적이 나온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의 성적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고득점을 한 그 어느 시험보다 훨씬 의미 있는 시험이었다. 학생 신분에 충실하고 학창시절의 마지막을 의미있게 보내고 싶던 나를 최대한 이해하고 배려해주고 도와준 병원에 대해 너무 큰 감사를 느낀다.
수능 후 본격적인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기분 나쁜 이상한 냄새의 빨간 항암제들이 중심정맥관을 통해 내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곧 항암치료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구토를 했다. 수 많은 주사바늘보다 구토를 견디는 게 더 힘들었다. 그리고 그 동안 고이고이 길러오던 머리카락들이 빠지기 시작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받는 단체기합처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망칠 수 있는 현실이 아니었다. 침대에 누웠다가 일어날 때마다 베개 밑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밤마다 이 현실이 꿈이기를 수 십 번, 수 백 번 기도하면서 잠들었지만 다음날 눈을 떠보면 나는 여전히 병원 침대에서 눈을 떴다. 결국 이발사 아저씨가 오셔서 빠진 머리카락이 잔뜩 엉킨 남은 머리를 정리해야 했다. 아침마다 병실 세면대에 서서 머리카락이 모두 빠진 얼굴과 환자복을 입은 내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
골수검사를 하려고 처치실에 새우등처럼 구부려 있는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골수검사를 하는 아픔보다는 내가 처한 현실에 서러워 또 한 번 눈물을 흘렀다. 나는 자신감을 잃어갔고 말수가 줄어들었다. 나를 치료해주시는 주치의 선생님이 오셔도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 할 수 없었다. 내가 주치의 선생님께 처음 말을 한 건 퇴원하기 이틀 전 집에 가도 좋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반문한 것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말하는 것도, 웃는 것도 처음 보았다고 하셨다.
그렇게 정신없는 한 달 간의 치료를 끝내고 2주 간의 휴식이 있었다. 긴 병원 생활에 적응해 두 번째 입원을 할 때에는 스스로를 많이 달랠 수 있었다. 그 때에는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편안한 병원 생활을 했던 것 같다. 면역력이 약한 나에게는 제한된 공간이었지만 병원은 산책을 할 수 있는 넓은 잔디밭과 빈터가 있었다. 그리고 나처럼 건물 밖으로 외출할 수 없거나 힘겨운 환자들을 위하여 병동과 연결된 실외 휴게실도 있었다.
저녁시간에는 평소 외래 환자들로 들끓지만 한가해지는 2층의 긴 복도를 거닐 수도 있었다. 실제로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공간이기도 했다. 조용하고 깨끗한 그 긴 복도를 지나면서 엄마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다. 건물 안의 불이 절반쯤 꺼지는 그 시간이 되면 우리 말고도 여러 쌍의 환자와 보호자가 산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믿음이 강하신 엄마는 외부의 절을 다닐 수는 없었지만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면 병원 내부에 마련된 조그만 법당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으셨다. 우리 엄마 뿐만 아니라 많은 환자와 보호자들이 병원에 마련된 법당과 교회, 성당에서 믿음을 키워 나가고 병마에 시달린 지친 마음의 위안을 얻곤 했다.
또 수 없이 많은 책들이 꽂힌 병원 도서관에서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접할 수가 있었다. 어린 환자들을 위한 동화책, 만화책부터 각종 소설책과 전문서적까지 마련되어 있었고, 환자들의 위생을 위해 매 번 대출하고 반납할 때마다 철저한 소독이 이루어졌다. 대강당에서는 환자들에게 필요한 설명회를 개최하기도 했고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영화도 상영하고, 각종 음악회나 연주회도 열곤 했다. 사람이 많은 1층에서는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든 환자들을 위해 성금 마련을 위한 사진전이나 그림전이 열리기도 했다. 비록 몸은 아파 병원에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기력하지 않고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많은 노력과 정성이 있었다.
아파서 서럽기도 했지만 병원 생활은 나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여러 간호사선생님들은 힘들어하고 외로워하는 어린 환자들을 위해 언니, 누나가 되어주었고, 방황하는 환자들에게는 동생이 되어주고, 늙고 지친 환자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그들의 딸이 되어주었다. 내가 있는 병동은 다른 병동보다 입원기간도 길고 긴급하고 제약된 일도 많아 무척이나 힘들 텐데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신기할 정도로 단 한 번 귀찮아하거나 짜증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각 병동을 맡고 있는 인턴, 레지던트 의사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달에 한번 새로운 병동을 담당하게 될 때면 수많은 환자들의 차트를 챙기며 밤 늦도록 자리를 지키면서 세상에서 가장 불안해 하고 연약해진 환자들을 위해 정성을 다했다. 각 병동을 책임지고 있는 직원분들은 수시로 병상과 병실을 관리하였고 청소하시는 분들은 더욱이 깨끗해야 하는 백혈 병동을 위하여 하루에도 몇 번이고 청소를 하셨다. 그리고 우리 환자들의 주치의 선생님들께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회진을 돌면서 하루 하루 불안을 해소해주고 희망을 불어 넣어주었다.
지난 해 6월, 4번의 항암치료 후 골수이식 일정이 잡혔다. 남동생과 골수가 맞지 않아 걱정이었는데 골수협회와 전문 간호사선생님간의 조율이 잘 되어 타인골수를 이식함에도 불구하고 신속하게 이식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무균실에서의 생활은 각오 이상이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두 세 평 남짓한 병실에는 침상 하나와 화장실 하나, 텔레비전, 개인 물품함이 전부였다. 강력한 항암제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을 이끌고 매일 샤워를 하는 일, 약을 먹는 일, 심지어 텔레비전을 보는 일도 너무 힘겨운 일이었다. 구토가 하도 심하여 무균실에 있던 약 3주간 물조차 쉽게 마실 수 없었다. 식사를 하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녹황색의 위액까지 모두 토해내면서도 내 속은 좀처럼 편안해지지 않았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샤워 후에는 겨드랑이와 엉덩이에 분도 발라야 했다. 입안 점막이 모두 헐어버린 고통을 덜기 위해 맞는 몰핀에 정신을 잃고 2~3일을 보낸 적도 있었다. 정신을 잃고 해대는 헛소리에 엄마는 극도로 불안해 하셨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다. 무균실에서는 하루에 엄마의 면회만 2시간 허락됐을 뿐이다. 하지만 아픈 채 혼자 있는 것이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간호사 선생님들의 눈치를 살피며 엄마는 최대한 내 곁을 지키려 하셨고, 그것도 모자라 나는 엄마가 침대 밑에 숨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긴긴 무균실 생활도 마지막 병원 생활도 끝나갔다.
경과가 좋아 빨리 퇴원할 수는 있었지만 그 후 3달 만에 갑작스레 찾아온 숙주반응과 속 울렁거림이 너무 심해 고생을 했다. 무균실에서 몸이 불어 있을 때보다 약 30킬로그램이 빠졌다. 그러자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외래에서 주사로 약을 처방해 주셔서 구토가 심한 약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 약 3달간 외래로 매일 주사를 맞으러 다니는 나를 항암주사실 간호사선생님들 역시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많이 좋아진 지금,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가는 외래 때마다 아산병원에 대해 뭉클한 느낌을 받는다. 병원에서 보낸 1년 넘는 생활이 너무 지겹고 힘들어 병원을 원망한 적도 물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다시 태어난 곳, 나를 두 번 살게 해준 곳이라는 생각에 한없이 고마움을 느낀다.
병원에서는 내가 수 많은 환자 중 하나겠지만 환자에게 있어 병원은 또 하나의 고향이다. 내가 1년 6개월이 넘도록 입원하고 지금도 꾸준히 다니면서 겪은 아산병원은 단순히 의사가 진찰하고 간호사가 보조하는 그런 병원이 아니었다. 수 많은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 그리고 또 많은 직원분들이 환자들에게 쏟은 정성은 희망이기보다는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을 받은 것은 너무 큰 행운이었다. 내가 다 나으면 나 역시 병들고 지친 다른 사람들의 위해 더 큰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긴 병원생활 동안 많은 친구가 생겼다. 병세가 나아서 건강을 되찾은 친구들도 있지만 아직도 힘겨운 투병을 하는 친구들, 독한 병마의 시달림 끝에 허무하게 먼저 가버린 언니, 오빠, 동생 그리고 아줌마들도 있다. 아직까지 믿고 싶지 않고 인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삶은 다른 이와 같은 그런 삶이 아니라 모두가 나에게 주어준 새로운 덤이라는 인생일 테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나를 아끼고 보살펴주신 주치의 이규형 선생님과 74병동, 84병동 간호사선생님들, 항암주사실 간호사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